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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북미
로키로 달리는 열차

비아레일 캐나디안호를 타고 밴쿠버에서 에드먼턴까지 달렸다. 캐나디안 로키의 깊고 찬연한 겨울이 기척도 없이 그 뒤를 쫓았다.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어떤 도시에서든 떠나는 아침엔 일찍 눈이 떠진다. 더 자보려 해도 자꾸만 또렷해지는 정신이 남은 숙면을 방해해 결국엔 꾸역꾸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거다. 명확히 구분하긴 힘들지만 떠나는 아쉬움이 짙을 때도 있고, 다음 일정에 대한 기대감에 설렐 때도 있다.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아침엔 두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오늘은 이번 여정이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날, 비아레일을 타고 북쪽으로 떠나는 날이다. 사실 밴쿠버는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이지만, 열차로 캐나다를 여행하는 이들에겐 서부 최대의 관문도시로 더 유명하다. 국영철도인 비아레일이 캐나다 전역을 19개의 방대한 노선으로 연결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캐나디안 라인의 서쪽 종점이 바로 밴쿠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캐나다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장 4466킬로미터짜리 열차 여행의 출발지(혹은 종착지). 그러니까 내가 밴쿠버를 여정의 목적지로 삼은 데는 이 비아레일에 대한 욕심도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추스르며 호텔을 나서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과연 레인쿠버가 마지막까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퍼시픽센트럴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일과처럼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다시 검색했다. 이번 검색 대상은 캠루프스Kamloops와 재스퍼. 앞으로 2일간 내가 거쳐갈 거점 도시들이다.

 

 

비아레일

퍼시픽센트럴역에서 비아레일과 처음 조우한 순간.

 

밴쿠버
밴쿠버

돔카와 출입문 너머로 바라본 열차 밖 풍경. 밴쿠버를 출발해 캠루프스로 향하며, 종일 눈이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돔카에서 전망을 즐기는 부부. 호주에서 온 여행객이다.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첫 번째 점심은 새우와 관자를 넣은 샐러드.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비아레일 캐나디안호의 슬리퍼 플러스 객실.

 

퍼시픽센트럴역은 아침부터 여행객들로 꽤 분주했다. 캐나디안호의 시작점인 이곳은 비아레일뿐 아니라 암트랙과 로키 마운티니어, 퍼시픽 코치 라인스 등 여러 북미 교통 시스템의 통로이기도 하다. 빠르게 카운터를 찾아 티켓을 확인하고, 열차 화물칸에 들어갈 수하물부터 체크인했다.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반입 규정을 초과하는 캐리어는 가져갈 수 없기에 최소한의 짐만 간추려 배낭에 꾹꾹 쟁여놓은 뒤였다. 이번 일정은 총 3박 4일이 소요되는 전체 캐나디안 라인 중 밴쿠버에서 에드먼턴까지의 1박 2일. 로키의 심장부인 재스퍼 국립공원을 통과하는 덕분에 캐나디안호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구간이다. 체크인을 마친 뒤 비아레일의 세일즈 & 마케팅 담당자인 라이언 로부카와 만나 우선 열차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쾌적한 전용 라운지를 지나 승강장에 들어서자, 은색의 매끈하고 클래식한 스테인리스 열차가 손님 맞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비아레일 캐나디안호의 좌석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요. 프레스티지와 슬리퍼 플러스, 그리고 이코노미 클래스죠. 가장 일반적인 침대 객실이 슬리퍼 플러스인데, 1인실과 2인실, 침대칸(문 대신 커튼이 달려 있는 객실)으로 이뤄져 있어요. 프레스티지는 슬리퍼 플러스의 고급 버전, 이코노미 클래스는 침대가 제공되지 않는 일반 좌석이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침대칸을 포함해 객실 차량과 식당 차량, 라운지 차량 등 열차 내 여러 구역을 구석구석 탐험했다. 철로 위라는 공간의 특성상 객실이며 복도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신 어찌나 효율이 좋은지 문짝 하나, 조명 스위치 하나조차 허투루 달린 것이 없었다. 레버만 돌려 잡아당기면 갑자기 침대로 변신하는 벽면이나 덮개만 살짝 덮으면 간이 테이블이 되는 세면대도 신기했다. 물론 열차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돔 형태의 유리로 뒤덮인 전망 차량이었다. 곧 이 유리 돔 위로 로키의 눈발이 쏟아져 내리겠지, 장엄한 산맥이며 호수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담길 테고. 지난해 겨울, 로키에서 만난 인생 최대치의 설경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라이언과 헤어진 뒤 라운지에서 잠시 커피를 홀짝이다 탑승 시간 맞춰 다시 열차에 올랐다. 내가 머물 객실은 개인 화장실을 갖춘 슬리퍼 플러스 2인실. 아담하고 폭신한 의자 2개가 공간을 적절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의자를 접은 뒤 벽면의 레버를 잡아 내리면 정확히 의자 2개가 차지했던 면적만큼의 2층 침대가 나타날 것이다. 치밀하게 동선을 계산해 정교하게 설계한 객실은 작지만 무척 쾌적하고 아늑했다.

 

 

 재스퍼 역

열차가 재스퍼에 잠시 정차하는 사이, 역 주변을 돌다 만난 영화 같은 풍경.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객실이 쭉 늘어선 복도. 정확히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다.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열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인 돔카. 늘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열차가 퍼시픽센트럴역을 빠져나가니 곧 점심시간이었다. 탑승 전 신청한 대로 2차 식사 시간에 맞게 식당칸을 찾자(1차를 고르면 열차에 타자마자 밥을 먹어야 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슬리퍼 플러스 이상의 승객에겐 매 끼니마다 격식 있는 식사가 제공되는데,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시간대를 둘로 나눈 뒤 하루씩 예약을 받는다. 그러니까 지금 함께 식사하는 승객들은 오늘 저녁에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빠르게 점심을 먹고 전망칸을 휘저을 계획이었으나, 맞은편 부부와 통성명을 하고 나니 식사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로키를 찾아 호주에서 왔다는 이들 부부는 내일 아침 재스퍼에서 내려 국립공원 전체를 탐험할 계획이라며 아이처럼 웃었다.


오후에는 내내 돔카에 앉아 있었다. 열차가 계속 프레이저강을 끼고 달렸는데, 자동차로 접근하기 힘든 구역을 통과해선지 풍경이 한결 은밀해 보였다. 아거시즈Agassiz에서 캐츠Katz까지, 노스벤드North Bend에서 애슈크로프트Ashcroft까지, 로키가 가까워질수록 숲과 강물의 빛깔도 점점 더 깊어졌다. 어느 순간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고, 듬성듬성 자리하던 집이며 건물도 거의 자취를 감췄다. 눈앞은 오직 설원과 숲, 아니면 숲과 호수. 고요하고 순결해, 바라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백색의 캔버스였다. 사실 TV도 없고(프레스티지에는 있다) 휴대전화 신호도 잘 잡히지 않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여행 중 손도 대지 않던 책을(늘 완독하리라 마음먹고 챙기지만 늘 서너 장을 넘기지 못한 채 도로 가져오는) 꺼내 읽거나 라운지에서 여러 이벤트에 참여해 친구를 사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창문 밖을 구경하며 멍하니 앉아있는 것뿐. 그런데도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 자꾸만 마음이 풍경 뒤로 떠밀려 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열차는 속도가 빠르지 않고 연착도 꽤 잦은 편. 대부분의 구간이 단선 철로라 복선 구간에서 수시로 대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금씩 기점을 통과하는 시간이 늦춰지던 열차는 결국 자정 언저리쯤 돼서야(본래 예정 도착 시각은 오후 9시 17분이다) 간신히 캠루프스에 도착해 몇몇 승객을 내려주었다. 캠루프스를 기점으로 이제부터는 로키산맥의 영역. 이미 완벽히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창문 너머의 새까만 밤조차 어쩐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침대에 누운 채 광활한 산과 호수 사이를 달렸다. 로키의 겨울은 다음 날 아침 본격적으로 찾아왔다. 새벽까지 내린 눈 때문인지 한창 눈꽃이 싱그러웠고, 추위를 이기며 억세게 솟아오른 자작나무 가지들이 만년설과 빙하지대를 집어삼켰다. 로키산맥 최고봉인 로브슨 산자락을 지날 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미 돔카 좌석은 만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들 유리창에 코가 닿아 있었다. 정오 무렵, 드디어 열차가 재스퍼에 도착했다. 본래 오전 8시부터 2시간 동안 정차할 예정이었으나 도착 시간이 너무 지체된 터라 계획대로 머물긴 어렵다고 했다. 결국 재스퍼에서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45분. 내가 속한 객차 2량의 전담 승무원이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까지 쫓아와 돌아올 시간을 재차 확인시켰다(이미 오전 내내 언제 도착하냐며 그를 괴롭힌 뒤였다).

 

 

 재스퍼

재스퍼 중심가에서 만난 세 친구.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라운지에는 각종 보드 게임이나 퍼즐, 종이로 만드는 열차 모형 등 간단한 놀 거리가 마련돼 있다.

 

 재스퍼 역

재스퍼역 내부.

 

비아레일 캐나디안호

곧 이 열차에서 내려야 할 때다.

 

1월의 재스퍼는 그야말로 새하얀 설원 마을이었다. 규모가 무척 아담했는데, 지난해 겨울에 들른 밴프 국립공원의 두 마을과 비교하자면 캔모어보다는 크고 밴프 타운보다는 작아 보였다. 높은 건물도 없고, 화려한 건물도 없는 메인 스트리트는 산책 삼아 한 바퀴 도는 데 30분도 안 걸릴 듯했다. 매년 겨울 전 세계 모험가들을 불러 모으는 캐나디안 로키의 2대 베이스캠프가 이토록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니, 나는 동서남북으로 거대한 로키의 장막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때마침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카페의 노란 불빛이 잔뜩 눈이 쌓인 도로 위로 스며들었다. 고작 40분 남짓한 짧은 산책이었지만, 재회를 다짐하기에도 충분한 시간. 다시 열차로 돌아와, 언제부턴가 마주치면 눈인사쯤은 하게 된 캐나다 부부와 함께 점심을 먹고 긴 담소도 나눴다. 그들은 토론토에 거주하며, 은퇴한 뒤부터 매년 두 차례씩 이 열차를 타고 밴쿠버로 향한다고 했다. “여름 로키가 얼마나 멋진데요, 한겨울 설경과는 또 다른 우아함이 있어요. 황금빛으로 물드는 대평원의 가을 풍경은 또 어떻고요.” 한참이나 대화를 주도하는 노부부의 청년 같은 눈빛을 바라보며, 나 역시 그러한 인생을 잠시 꿈꾸고 말았다. 느리고 고요해서 더 아름다운 차창 밖 풍경 같은 삶. 열차에서 마주한 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훑고 갔다. 그 모든 것이 이번 겨울 캐나다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완벽히 새로운 여정이었다.

 

 

<2019년 2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강신환
취재 협조
캐나다관광청 kr-keepexploring.canada.travel
밴쿠버관광청 www.tourismvancouver.com
비아레일 캐나다 www.viarail.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