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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성벽을 따라
공산성

밤이 찾아온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의 서쪽인 금서루.

 

다시 원도심으로 향했다. 웅진백제의 산성이자 왕성인 공산성이 마지막 목적지다. 다시 송산리고분군을 거쳐 공산성으로 향하는데 검은 벽돌로 만들어진 연문羨門이 보였다. 연문은 생과 사의 공간을 나누는 문이다. 아치 모양 문을 넘어서 생의 공간에 들어서자 곧장 공산성이 보였다. 고구려에 밀려 도읍을 옮겼던 백제가 쌓은 산성은 이후 조선시대까지 쓰였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돼요. 계절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라 자주 찾아도 언제나 좋아요.” 문화해설사는 평소 이 성벽을 따라 걷기를 즐긴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날도 산책 삼아 편안한 차림으로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쌓은 지 1500년도 넘은 산성이 오늘날에도 공주 시민들에겐 일상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금의 공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모습이에요. 웅진백제 땐 흙으로 벽을 만들었죠.” 다듬어지지 않은 납작한 돌이 촘촘하게 쌓여 벽을 이뤘다. 북쪽으론 금강이 흘렀고 해발 110미터인 공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이 굽이지게 만들어져 방어에 용이했다. 그런 연유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돌로 벽을 보수하고 내부에는 충청감영을 세웠다. 산성의 서쪽인 금서루에서 보았을 땐 그런 이야기에 비해 의외로 아담하고 높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발아래 보이는 공주 시내가 점점 작아졌다. 높게 올린 성벽이 아찔한 절벽처럼 보였다. 침략 때문에 쫓기듯 내려왔음에도 지형을 십분 활용해 요새를 만든 백제 사람들이 놀라웠다. 남쪽 문인 진남루에 닿기 전에 왕궁지를 만났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 건축 형태를 추측만 할 뿐이다. 텅 빈 자리를 대신한 건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쌍수정이다. “이괄의 난 때문에 공산성으로 피난 왔던 인조가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랬다고 해요. 이후 나무에 벼슬을 내리고 그 자리에 쌍수정을 만들었죠.” 지금은 두 그루 나무도 죽고 둥치가 작은 나무 여럿이 정자를 감싸고 있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심은 것이라지만 풍경만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했다.
 

 

공산성

성벽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계룡산도예촌

계룡산도예촌의 공방은 외관부터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금강철교

공주를 가로지르는 금강에 놓인 금강철교.

 

남은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북쪽인 망북루에 가까워지자 성벽은 내리막길을 이뤘다.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평지를 이룬 땅은 금강과 이어졌다. 강북에는 여느 도시처럼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있었다. 불빛이 잔잔하게 들어와 강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다. “금강철교는 1933년에 건설된 거예요. 당시엔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였어요.” 강남에서 강북으로 향하는 일방통행만 가능한 다리로, 규모는 작았지만 근대 교량의 형태가 요즘의 화려한 다리와는 다른 우아함을 지녔다. 구름이 많이 낀 탓에 금강으로 지는 석양을 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거짓말처럼 성곽을 둘러싼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노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성벽이 더욱 웅장해 보였다. 강변인데도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잔잔한 밤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쩐지 공주에서는 가는 곳마다 눈길을 사로잡혀,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옮기기가 어려웠다.

 

 

<2019년 2월호>


에디터 권아름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공주시청 www.gong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