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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느린 풍경

담양 숲길 예찬③

 

소쇄원

소쇄원에서 맞은 아침.

 

 삼지내마을

창평면 삼지내마을의 초여름 풍경.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도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조선시대 원림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소쇄원瀟灑園. 곧 밀어닥칠 인파를 피해, 누구보다 먼저 정원의 숲길을 밟고 싶었다.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된 후 죽임을 당하자 제자였던 양산보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원이에요. 인위적인 손길을 최대한 덜어내고 자연 본연의 멋을 살린 건축미로 평판이 자자하죠.” 병풍처럼 둘러싼 장원봉 줄기 아래,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와 동백이 어우러진 원림은 과연 은둔을 택한 선비의 거처로 부족함이 없었다. 남쪽으로 무등산이 넘어 보였고, 원효계곡의 청량한 물줄기가 돌과 나무 사이를 관통했다. 이런 정원을 가졌는데 정치며 입신양명에 무슨 미련이 있겠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비경이었다. 그러니까 대대로 이 정원의 주인과 손님들은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 작은 못 위의 다리를 건너, 광풍각 대청마루에 앉아 잠시 물 흐르는 소리를 듣다가, 제월당으로 넘어가 서책을 꺼내 들었으리라. 그 시대 선비들이 나눴을 사색과 풍류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나무와 숲, 돌과 물, 빛과 그림자 위로 포개졌다. 모든 공간이 자연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종일이라도 머물고 싶던 소쇄원을 벗어나(한발 늦게 들이닥친 수학여행객 무리 덕분이었다) 창평슬로시티 쪽으로 가다가 잠시 한국가사문학관에 들르기로 했다. 평소 가사문학에 큰 관심이 없어도 정철이나 송순 같은 대가의 이름들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담양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산실이에요. 송순의 고향이자 정철이 유년기를 보내고 문학을 배우고 조정을 떠날 때마다 수시로 내려와 머물던 곳이죠. 이들의 작품을 포함해 18편의 가사가 이 고장에서 전승되어왔어요. 이러한 유산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가사문학관을 건립했고요.” 사실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수려한 자연경관 덕분에 정치에 뜻을 잃은 선비들이 내려와 정자 하나 짓고 시문을 노래하며 살기에 최적화된 고장이었다. 소쇄원을 비롯해 정철이 <성산별곡>을 쓴 식영정息影亭, 송순이 후학을 양성하던 면앙정俛仰亭 등 구석구석 이름 높은 정자가 많은 건 그 때문. 농사짓기 좋은 땅이니 늘 곡식이 풍족했고, 곳간이 가득 차니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면 삼지내마을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 흔히 ‘창평슬로시티’라 불리는 이곳은 돌담길과 개울, 첩첩이 쌓인 기와까지,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다. 느긋하게 둘러보는데도 1시간이면 충분한 작은 마을 곳곳에 이름난 고택이 가득한데, 호남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자 임란에서 한말까지 의병운동의 중심지로도 꼽히는 곳들이다. 삼지내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는 낮은 돌담길을 걸으며, 배고픔도 잊은 채 느린 시간의 자취를 만끽했다. 대단한 볼거리나 압도적인 풍광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전통을 지키고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름 볕처럼 찬연히 마음을 파고들었다.

 

 

 승일식당

담양의 명물로 꼽히는 승일식당의 숯불돼지갈비.

 

한국대나무박물관

한국대나무박물관 내부.

 

오후 2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관방천 부근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정에서 떡갈비보다 더 고대한 음식이 있다면 그건 ‘승일식당’의 숯불돼지갈비. 워낙 대단한 칭송을 많이 들어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숯불 향이 가득 밴 담백한 돼지갈비와 정갈하고 인심 좋은 밑반찬이 이방인의 걱정을 깨끗이 지워냈다. 밥 한 그릇에 냉면까지 곁들여 돼지갈비와 양념게장, 각종 밑반찬을 해치우고 나니 어느새 3시. 애초 떠나기로 예정한 시간이지만, 자꾸만 발걸음이 아쉬워져 마지막 목적지를 하나 더 찾아보기로 했다. 시내 남서쪽에 위치한 한국대나무박물관은 담양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8개 전시실에 비치된 1800점의 전시물을 감상하며 국내 죽공예의 역사를 훑고 박물관 뒤편에 조성된 대숲 산책로를 걷는 사이, 나는 마치 이 여정의 시작점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통 초록으로 덮인 세상, 묵직한 침묵 위로 바람 소리만이 궁그는 땅. 여름 햇살조차 쉬이 파고들지 못하는 완벽한 치유의 공간이었다.

 


<2019년 6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담양군청 www.damya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