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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유럽
마지막 야생의 땅, 캄차카

러시아 극동에 숨은 캄차카의 자연은 인간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때론 세심하게, 때론 난폭하게 이 땅이 온전히 자신의 영역임을 알린다. 그 절대적 존재감이 여행자의 매 순간을 경이로 이끈다.

 

캄차카
캄차카
캄차카
캄차카

야생의 자연은 매 순간 인간을 짓눌렀고 때론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나, 그렇기에 그 안에서의 순간순간을 더 예민하고 황홀하게 느끼도록 해줬다. 온몸의 감각을 바짝 곤두세운 채,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오르고 휘청거리는 헬리콥터에 몸을 실었다.

 

 

캄차카

주도인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의 거리 풍경.

 

캄차카

무트놉스키 화산 정상부는 짙은 유황 가스로 가득하다.

 

캄차카

극지의 강인한 생명력.

 

캄차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 현지인에게 얻은 대게 한 마리.

 

캄차카

성삼위일체 성당.

 

캄차카

공원에서 만난 캄차카 청년들.

 

저녁 무렵, 느지막이 찾은 온천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셰퍼드 두 마리가 빈 주차장을 휘저었고, 사방에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골 목욕탕 같은 허름한 입구를 지나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 아주머니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유… 코리안?” 어색한 침묵을 깬, 꼭 혼잣말 같던 질문. 보통 탈의실에선 시선 처리에 신중한 편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의 피부색과 이목구비는 정말로 친숙했다. 그는 고려인이었다. 그것도 캄차카Kamchatka에 거주하는 고려인.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도 “코리안”이며 “이 동네에 산다”고 더듬더듬 말한 뒤 더는 영어를 못한다며 손을 휘저었다. 사실은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순간이었다. 러시아에 고려인이 거주한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여긴 모스크바도 블라디보스토크도 아닌 캄차카 아닌가. 이토록 외진 동토의 마지막 반도에서, 그것도 도시와 한참 떨어진 노천 온천 탈의실에서, 서로 옷을 반쯤 벗은 채로(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다) 마주치게 될 줄이야.


돌이켜보면 캄차카에서 보낸 일주일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나는 초여름에 접어든 이 땅이 이토록 추울 거라 예상하지 못했고, 필수 코스라던 화산 트레킹이 이렇게까지 위험천만한 여정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으며,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러시안들이 이만큼 잘 웃고 친절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도 지구상에 인간이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을 거라 기대하지 못했다. 도로가 완전히 끊긴 대지와 사방에서 부글거리는 활화산들, 얼어붙은 바다처럼 물결치는 검은 설원이 매일, 온종일, 일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태평양과 오호츠크해에 접한 러시아 동쪽 끝의 반도, 연어의 고향이자 세계 최대의 불곰 서식지로 알려진 야생의 세계. 이곳 캄차카에서 나는 내 여행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 기준점 하나는 지금껏 내가 접한 지구 풍경 중 가장 날것에 가까웠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토록 날씨가 극악한데도 여행이 완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는 것. 엄청난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날씨는 정말 좋지 않았다. 추운 건 그렇다 쳐도 매일 비가 오락가락했고, 종종 안개 때문에 바로 앞의 낭떠러지조차 가늠키 어려웠다. 폭우로 투어가 취소되는 일도 잦아, 현지에서 전체 일정을 몇 번이나 다시 짰다. 그러니까 내가 다녀온 캄차카는 사실상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순간의 캄차카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만 놀라웠던 건 그렇게 흐리고 어둡고 위험한 세계에서 마주한, 정말 예기치 못하게 경이로웠던 순간순간들. 이를테면 끝내 트레킹을 멈춰야 했던 아바친스키 화산Avachinsky Volcano 중턱에서 안개가 거대한 산짐승처럼 내 몸을 관통한 순간이라든지, 아예 기대를 버리고 찾은 6월의(불곰이 나타나기엔 다소 이른 시기다) 쿠릴 호수Kurilskoye Ozero에서 발랄하게 설원을 누비는 새끼 불곰 두 마리를 맞닥뜨린 순간이 그랬다. 야생의 자연은 매 순간 인간을 짓눌렀고 때론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으나, 그렇기에 그 안에서의 순간순간을 더 예민하고 황홀하게 느끼도록 해줬다. 마치 대항해시대의 탐험가들 같은 마음으로, 온몸의 감각을 바짝 곤두세운 채,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오르고 휘청거리는 헬리콥터에 몸을 실었다. 누군가는 캄차카를 “지구 위 마지막 야생의 땅”이라 말했다. 원시, 미지, 신비 같은 단어도 쏟아졌다. 여행자의 회고를 채운 온갖 수식어들에 나도 이젠 온전히 마음을 기댈 수 있게 됐다. 살아 숨쉬듯 들끓는 대지와 우아한 야생동물로, 때로는 투어 가이드를 절망시키는 냉혹한 날씨로, 캄차카의 자연은 매 순간 나를 완벽히 압도했다.

 


<2019년 7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하나투어 www.hanatour.com 프라이드통상, 바이칼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