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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북미
내파밸리 와인 로드

내파밸리의 명물 와인 트레인에 올랐다. 풍성한 요리와 내파밸리산 와인을 맛보고, 광활한 포도밭을 누비며 미국 와인산업의 개척자들과 조우했다.

 

내파밸리 와인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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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파밸리 와인 트레인이 탑승 준비에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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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클래식한 열차 내부.

 

내파로 떠나는 날,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하늘이 화창하기만을 바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매일 비가 오락가락하고 안개도 심해 도무지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제발, 기대하고 또 고대했다. 내파밸리의 짙은 포도나무 군락 위로 그 청량하다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쏟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쉴 새 없이 내던져지는 게 여행의 묘미라지만, 고작 한두 시간 동안 어찌나 하늘이 맑아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던지 아침 내내 쉬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오전 9시, 결국 오늘 날씨가 어떨지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차는 내파로 출발했다. 다운타운을 가로질러, 금문교를 지나, 베이 지역 북부의 굴곡진 언덕길을 오래도록 내달렸다. 소노마 카운티의 셸빌Schellville 부근부터 조금씩 포도밭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내파와 가까워질수록 사방의 녹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역시 와인의 땅이군, 비록 잎도 열매도 없는 앙상한 가지뿐이었지만 포도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녹색 들판은 꽤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했다. 오전 10시 30분쯤 첫 목적지인 내파밸리 와인 트레인 역에 도착하자 야트막한 언덕 위, 빈티지한 열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9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는 내파밸리 와인 트레인Napa Valley Wine Train. 내파밸리의 오랜 명물이자, 캘리포니아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 더불어 오늘 내가 도시에서의 하루를 덜어내고 이곳 내파까지 찾아온 이유다.

 

 

내파밸리 와인 로드

메인 요리로 고른 로스트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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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하는 셰프가 고급 레스토랑 못지 않은 캘리포니아 요리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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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창문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포도밭.

 

샌프란시스코 북동부에 자리한 내파밸리는 오늘날 미국 와인의 본산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화산재로 뒤덮인 비옥한 땅과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바닷바람이며 안개가 빚어내는 큰 일교차까지, 포도를 기르기에 좋은 조건은 전부 갖추고 있기 때문. 실제 미국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은 세계적 와인 생산국으로 만든 데는 ‘와인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이곳 내파의 힘이 크다. 생산량은 적어도 품질 면에선 압도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니(미국에서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컬트 와인은 대부분 내파산이다) 당연히 와인 애호가들에게도 로망의 땅. 덕분에 내파 카운티 구석구석 투어 프로그램을 갖춘 와이너리가 제법 많지만, 여행자들이 직접 동선을 짜고 와이너리를 선별해 둘러보는 건 사실상 쉽지 않다. 이럴 때 유용한 선택지가 바로 와인 트레인이다. 내파밸리 와인 트레인의 투어 프로그램은 몇몇 특별 이벤트를 제외하면 크게 런치와 디너, 반나절, 하루 일정으로 나뉜다. 총 11가지 투어가 마련돼 있는데, 그중 내가 택한 건 대표적 하루 코스인 ‘앰배서더 와이너리 투어’. 우아한 열차 전망칸에서 캘리포니아 요리와 와인을 맛보며 1시간 30분가량 포도밭을 가로지르다가 인기 와이너리 2곳에 들러 테이스팅을 즐기는 일정이다. 탑승 시간은 오전 11시경. 함께 대기하고 있던 여행객 무리를 따라 열차에 오르자, 20세기 유럽을 연상시키는 클래식한 내부 디자인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호가니와 황동, 붉은 벨벳으로 치장된 열차 안은 외관보다 한층 더 호화롭고 고풍스러웠다. 친절한 승무원들이 승객을 자리까지 안내한 뒤 이내 웰컴 와인을 내왔다. 청량한 내파밸리산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이며, 천천히 눈앞을 스치는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이미 더는 파란 빛깔을 기대할 수 없는 하늘이었지만, 손에 쥔 와인과 내파밸리를 가로지르는 열차, 사방에서 번지는 웃음소리가 우중충한 날씨조차 낭만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무엇보다 근사한 것은 3코스로 제공되는 점심 식사였다. 열차 주방에 상주하는 셰프가 신선한 현지 농산물과 해산물로 내파 스타일의 각종 요리를 선보이는데, 메뉴판 속 모든 요리에 추천하는 와인 리스트가 덧붙여져 있다. 이를테면 로스트치킨에는 벨레 그로스 라스 알투라스 피노 누아Belle Glos “Las Alturas” Pinot Noir를, 가리비 구이에는 스택스 립 핸즈 오브 타임 샤르도네Stag’s Leap “Hands of Time” Chardonnay를 추천하는 식이다. 한창 신나게 먹고 마시며 식사를 즐기는 사이, 열차는 욘빌Yountville과 오크빌Oakville, 러더퍼드Rutherford 등 내파 카운티의 주요 마을을 지나 어느새 세인트헬레나St. Helena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일정에 와이너리 투어가 포함된 승객들은 이제 열차에서 내려 픽업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테이스팅 로드의 첫 목적지는 찰스 크루그 와이너리Charles Krug Winery. 오늘날 내파밸리에 위치한 1800여 개의 와이너리 중 가장 오래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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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크루그 와이너리에서 시음한 첫 와인은 2017년산 샤도네이다.

 

내파밸리 와인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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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크루그 와이너리 내부의 여러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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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여긴 1861년 프로이센 이민자 출신인 찰스 크루그가 설립한 와이너리예요. 꾸준한 양조 기술 혁신을 통해 당대 내파밸리는 물론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포도원으로 성장한 곳이죠.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된 뒤 문을 닫았다가 1943년 포도원을 인수한 이탈리아 출신 몬다비 가문에 의해 다시 부흥을 시작했고요.” 와이너리에 도착하자마자 웰컴 와인 한 잔씩을 건넨 가이드는 먼저 이곳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 양조자의 개인사보다는 지금 생산되는 와인 자체가 궁금했던 터라 좀 당혹스러웠는데, 듣다 보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의외로 많았다. 이를테면 몬다비 가문의 2대째 오너이자 현재 오너의 부친인 피터 몬다비의 이야기가 그랬다. 수완 좋은 사업가라기보다 진지한 와인 연구자였던 그는 내파밸리 와인의 수준을 유럽에 견줄 만큼 끌어올리며 ‘미국 와인의 전설’이라 칭송받는 로버트 몬다비의 동생이다. “체사레 몬다비가 포도원을 인수한 이후, 두 아들인 로버트와 피터가 이곳에서 함께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형제간의 불화로 로버트가 독립해 나와 오크빌에 새로운 와이너리를 설립하게 되죠. 그게 바로 지금 내파밸리 최대 규모의 와이너리인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예요.” 가이드와 함께 와이너리 내 여러 건물을 둘러보며 피노 누아,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등 총 4가지 와인을 시음했다. 압도적인 규모의 레드우드 셀러와 양조 시설, 고풍스러운 테이스팅 룸도 구경했다. 구석구석 우아한 조명과 가구, 낡은 양조 기구들이 가득한 건물 내부는 공간 자체만으로 이곳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포도밭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직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황량했지만, 곧 저 빼곡한 가지 위로 포도가 하나둘 열리기 시작할 거다. 포도나무 사이사이 화사하게 핀 유채꽃 들판이 이미 봄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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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레이먼드 빈야드의 테이스팅 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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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 투어는 이런 맛에 한다.

 

세인트헬레나를 빠져나와 이번엔 러더퍼드로 향했다. 오늘 투어의 마지막 장소인 레이먼드 빈야드Raymond Vineyards에 가기 위해서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최초의 와인을 선보인 레이먼드 빈야드는 1930년대부터 베린저Beringer의 와인메이커로 일하던 로이 레이먼드가 러더퍼드의 포도밭 부지를 구매해 세운 와이너리다. 이후 5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하며 내파밸리 와인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2009년엔 프랑스의 유명 와인그룹 부아세Boisset에 인수되며 비즈니스 전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프랑스 와인업계를 주도해온 세련된 생산 기술이 내파밸리의 자연과 만나 개성 있는 와인을 탄생시킨 것. 특히 현재 오너인 장 샤를 부아세는 모든 포도밭을 유기농 및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 관리하는 것은 물론 명성 높은 와인메이커 스테파니 퍼트넘을 영입하고 테이스팅 룸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등 상당히 공격적인 투자를 펼쳐왔다. 실제로 투어 가이드가 일행을 맨 처음 데려간 곳도 ‘시어터 오브 네이처Theater of Nature’란 이름의 와이너리 농장. 레이먼드 빈야드의 기술자들이 각종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실험하고 연구하는 장소다. “아마 내파밸리에서 가장 큰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용 교육 공간일 거예요. 토양에서부터 재배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가 양질의 와인을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죠.”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초록빛 텃밭이며 가축 우리는 마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농가에 와 있는 듯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 시음한 와인들 역시 여느 내파밸리 와인과 달리 무척 섬세하면서 여운이 깊고 은은했다. 레이먼드 빈야드가 낳은 독특한 개성은 건물 내부 시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이키델릭한 조명으로 가득한 셀러와 블렌딩 룸은 클럽을 연상시켰고, 붉은 패브릭으로 뒤덮인 테이스팅 룸은 시내 중심가의 고급 바 같았다. 와인 잔을 손에 쥔 채 와이너리 곳곳을 탐방하며, 오늘날 미국 와인산업을 이끄는 내파밸리 농가들의 규모와 힘, 그리고 가능성을 실감했다. 전문가처럼 속속들이 와인 맛을 분석하고 가늠할 순 없었지만, 이런 여행 동반자와 함께라면 몇 번이든 다시 내파밸리를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석양 직전의 노란 어둠이 막 포도밭 위로 짙게 깔릴 무렵이었다.

 

 

<2019년 4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백지현
취재 협조 샌프란시스코 관광청 www.sftravel.com 유나이티드항공 www.unite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