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DESTINATIONS - 아프리카
느린 여행의 미학, 라디그
자전거는 라디그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자전거는 라디그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화려하게 장식한 비치 바

화려하게 장식한 비치 바.

 

만약 당신이 여행지에서는 무조건 초 단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남들보다 최대한 많은 것을 보아야만 ‘만족한 여행’이라 생각하는 여행자라면 산책 리스트에서 라디그를 지워도 좋다. 그러나 잠시 삶의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느리게 흘러가는 섬의 시간에 순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곳은 세이셸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세이셸국제공항에 내려 페리를 타고 프랄린, 라디그까지 단숨에 이동한 건 내가 정확히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로 3킬로미터, 세로 5킬로미터 크기의 작은 섬. 인구 3000명이 사는 라디그는 사실 세이셸을 이루는 115개 섬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기기묘묘한 화강암 바위, 깨끗한 모래사장, 푸른 야자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인간의 상상력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끝자락의 풍경을 보여준다. “섬 전체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서 쉽게 개발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리조트도 소규모로만 지을 수 있죠.” 단순히 섬의 크기 문제가 아니다. 도로에서 자동차를 보기 힘들고, 마땅한 대중교통도 없으며, 자전거가 두 다리를 대체할 거의 유일한 수단인 건 이런 이유에서다.

 

 

평화로운 오후의 백사장

평화로운 오후의 백사장.

 

리조트에서 햇살을 즐기는 여행자

리조트에서 햇살을 즐기는 여행자.

 

로컬 맥주 세이브루

로컬 맥주를 맛보고 싶다면 세이브루를 추천한다.

 

라디그에서 만나는 여행자의 모습은 늘 자전거와 함께였다.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전거를 전혀 탈 줄 몰랐으나 별다른 묘수가 없었다. 다행히 도로가 평평해서 페달을 몇 번 굴리다 보니 금세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페리 선착장 근처인 라 파스에서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본격적으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느린 속도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로컬 바와 말간 해변을 지나친 뒤, 시원한 세이브루Seybrew 한잔으로 한낮의 열기를 식혔다. 북동쪽의 거친 파도까지 섭렵한 다음에는 섬의 서쪽으로 방향을 틀 차례다. 목적지는 유니언 에스테이트l’Union Estate. 코코넛 나무와 바닐라 나무가 자라고 육지거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이곳을 찾은 모든 여행자의 길, 그러니까 유니언 에스테이트의 하이라이트는 1킬로미터 길이의 해변인 앙스 수르스 다르장으로 이어진다. 입구에서 마주쳤던 프랑스 여행자 그룹은 이미 해변의 가장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열심히 물장구를 쳤고, 화강암 바위에 걸터앉아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는 이들의 뒷모습은 햇살을 받아 빛났다. 해변 뒤쪽을 차지한 가판대에서는 화려한 프린트의 숄과 드링크를 팔고 있었지만, 유유자적 휴식하는 이들을 향해 누구 하나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았다. 물론 라디그에서 앙스 수르스 다르장의 명성을 이길 만한 곳은 없겠지만, 다른 해변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그랑 앙스, 프티 앙스, 앙스 레위니옹Anse Réunion, 앙스 세베르Anse Severe, 앙스 포르미스Anse Fourmis 등 섬을 둘러싼 모든 해변이 각기 다른 물빛과 풍광을 자랑한다. 그러니 아무리 여유롭게 보낼지라도 게으른 자, 이곳에서는 유죄다.

 


<2020년 1월호>


에디터 김수현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세이셸관광청 www.visitseychell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