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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STIC - DOMESTIC TRAVEL
비오는 날엔 시와 숲

푸른 섬 거제②

 

거제 둔덕기성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란 둔덕기성.

 

거제 청마생가

청마생가에는 옛 생활이 담겼다.

 

거제 청마기념관

청마기념관 입구에는 시인의 동상과 그의 시가 있다.

 

거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어촌마을에 닿는다.

 

서울에서 거제로 향하다 보면 통영과 거제를 잇는 신거제대교를 건너게 된다. 1999년에 개통한 다리로 바로 옆에 있는 거제대교의 증가한 통행량을 분담하기 위해 만들었다. 1971년 만들어진 거제대교는 겉보기에 화려하진 않지만 거제와 육지를 연결해 더 많은 이들이 섬으로 유입되어 발전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대교를 넘어 첫 목적지인 청마기념관에 도착했을 땐 우산 없이도 거닐 수 있을 만큼 비가 내렸다. 청마기념관은 거제에서 태어난 시인 유치환을 기리는 곳이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시 <깃발>를 비롯한 그의 시 세 편이 새겨진 비석이 입구에 놓여 있다. 1931년 처음 세상에 시를 낸 후 시인으로 살아온 그는 대부분 문인들이 서울에서 활동했던 것과 달리 경주와 부산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경남지역의 문단을 이끌었다. 총 2층 규모로 이뤄진 기념관 1층에는 그의 생애를 사진과 함께 전시해 보여주었다. 2층 전시실에는 그의 육필 원고와 일기, 편지가 전시되었다. 시인이 활동하던 당시 주류였던 서정시와 달리, 의지적인 언어로 채운 시를 쓴 그의 필체는 생각보다 거칠지 않고 도리어 동그랗고 단정했다. 그의 시에서 보인 의지적 태도는 실은 스스로가 일찌감치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자신을 다듬어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함이었다. 수정된 부분이 거의 없이 단번에 써내려간 초고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다듬질을 한 후 나온 언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 옥상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데, 주황색 지붕을 얹은 단층짜리 옛 집들로 가득한 마을을 산방산과 우봉산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 풀빛이 더욱 짙어진 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걸려, 산방산 정상의 암석으로 된 봉우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둔덕기성에 가면 산방산 꼭대기가 더욱 잘 보여요. 기념관에서 차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신라시대 때 축조된 둔덕기성은 우봉산 자락에 있다. 기념관 직원의 추천을 받아 내비게이션에 둔덕기성을 입력했다. 5분 정도 시골길을 달리자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초보 운전자였다면 선뜻 도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불구불한 산길이었다. 거제에서 발견된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자, 신라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사용되어 그 시대 성벽 축성법의 변화를 알기에 중요한 사료가 되는 둔덕기성은 건축적, 역사적 의의에 비해 잘 알려지진 않았다. 유적지 설명이 담긴 안내판은 있었으나 잘 가꾸어놓지 않아 성벽 주변으로는 들풀과 색색의 야생화가 웃자랐다. 비가 내려 사람도 없으니 비밀의 숲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해발 326미터, 돌을 쌓아 만든 성벽에 오르니 그 높이가 더욱 실감 났다. 비록 날씨가 흐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평소에는 둔덕면 일대와 거제대교가 놓인 견내량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7세기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산에 돌담을 쌓아 성벽을 쌓았다는 게 놀라웠다. 당시에 급수를 담당했을 동그란 집수지, 공격을 위해 해안가에서 모아온 몽돌 무더기 등을 복원해두었다. 둔덕기성은 고려 때 폐왕성으로 불렸는데, 의종이 폐위 되어 3년간 유배를 당했던 성이기 때문이다. 무신의 난으로 권력을 잃고 쫓겨온 의종은 성벽 주변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라 땐 주변의 동세를 살피기에 좋은 위치였지만, 그에게는 주변의 웅장한 자연이 자신을 막아선 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빗물을 머금은 토끼풀로 가득한 바닥을 걷느라 신발이 흠뻑 젖었지만 느린 걸음으로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거제 카페 리묘

카페 리묘의 단호박 라테와 티푸드.

 

거제 카페 리묘

옛 촌집의 정취를 살린 카페 리묘.

 

거제 오늘, 위로

옥포동의 책방 오늘, 위로

 

산에서 내려올 즈음엔 빗줄기가 굵어져 잠시 둔덕면에 있는 카페 리묘를 찾았다. 요즘 거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곳으로, 거제 토박이인 자매가 촌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아침마다 직접 만든다는 케이크와 따뜻한 단호박 라테를 마시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오후가 되자 거센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수국이 한창이라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차창이 뿌옇게 되어 수국도, 바다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차를 돌려 시내인 옥포동으로 움직였다. 조선소 인근 동네로 아파트와 빌라가 밀집했는데 최근 이 동네에 책방 하나가 문을 열었다. 카페를 겸해 동네 사랑방이 된 ‘오늘, 위로’다. 중고책과 독립출판물 위주로 판매하는 책방으로 중고책의 경우 수익금은 유기견, 유기묘를 위해 사용한다. 손때가 묻은 시집 한 권을 사들곤 자리를 잡았다. 예기치 못한 비바람에 젖은 옷을 말리며 오랜만에 책 한 권을 한 자리에서 다 읽었다. 뜻밖의 시간이었다.

 


<2019년 8월호>


에디터 권아름
포토그래퍼 전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