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DESTINATIONS - 유럽
무트놉스키 화산 트레킹

길 없는 길을 헤치고 얼어붙은 협곡을 건너 무트놉스키 정상에 닿았다. 지독한 유황 가스 너머, 지구의 가장 내밀한 풍경이 펼쳐졌다.

 

무트놉스키 화산

일주일간 캄차카를 누비며 가장 곤란했던 건 날씨였다. 우선 예상보다 추웠고(매일 패딩을 입었다), 자주 비가 내렸으며(매일 우산을 챙겼다), 작은 봉우리 하나만 넘어도 계절이 달라졌다(매일 한두 겹씩 옷을 벗었다 입기를 반복했다). 보통 여행지에선 폭우가 쏟아지든 눈보라가 휘몰아치든 그때그때 최선의 길을 찾는 데 익숙했는데, 당장의 일기예보조차 믿을 수 없게 되니 모든 의사결정이 더디고 불안해졌다. 저녁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다음 날의 투어가 취소될까 두려움에 떨었다. 화산 트레킹과 보트 투어, 헬리콥터 투어까지, 캄차카의 필수 액티비티 목록엔 어느 하나 날씨에 민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트놉스키 화산 트레킹은 내가 현지에서 유일하게 날짜를 바꾸지 않고 진행한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전날 밤까지도 비가 쏟아진 터라(그날의 산행은 취소됐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렸는데, “일단은 가볼 만하다”는 투어업체의 답변이 얼마나 기적 같았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다음 날 새벽 6시 30분경, 숙소가 자리한 파라툰카 온천지대에 특수 개조한 산악용 차량이 도착했다. 오늘 여정의 안내자는 예브게니 코스튜코프. 현지 투어업체인 캄차카 아웃도어스Kamchatka Outdoors의 대표 겸 산악 전문 가이드다. “무트놉스키는 지금도 유황 분출이 활발한 활화산이에요. 불과 20년 전에도 분출이 일어났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조심해야 해요. 절대 단독 행동을 해선 안 돼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1시간쯤 달렸을까, 차가 빌류친스키 화산을 지나면서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숲과 나무가 사라지고, 사방에 화산재와 눈덩이가 쌓여갔다. 곧이어 도착한 무트놉스키 초입의 빙하지대는 그야말로 다른 행성 같았다. 일단 길이란 것 자체가 없고, 눈발도 거세게 날려 좀처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이정표라곤 설원 위로 듬성듬성 꽂힌 깃발뿐. 냉철한 산악용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제냐(예브게니의 애칭, 보통 러시아에선 지인끼리 서로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의 드라마틱한 운전 솜씨가 아니었다면, 이 여정은 아예 시작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트놉스키 화산
무트놉스키 화산
무트놉스키 화산

물론 극지의 자연이란 끝까지 안심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칼데라호를 지나 능선 하나를 넘을 무렵 안개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중턱쯤에서 결국 차가 멈춰 섰다. 눈에 파묻힌 바퀴가 계속 헛돌았다. 오전 11시였는데, 오후 5시는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제냐와 의논 끝에 잠시 차를 포기하기로 했다. 계획한 트레킹 시작점과는 전혀 다른 장소였지만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실 등반 경로가 늘 같진 않아요. 한 번씩 겨울을 넘길 때마다 지형이 조금씩 달라지거든요. 눈이 많이 쌓이거나 암반이 허물어지며 원래 길이 사라지는 경우도 잦고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코스를 찾아요. 지금처럼요.” 그를 따라 예기치 못한 모험가의 길을 개척하는 사이, 솔직히 풍경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땅이 푹푹 꺼졌고, 때론 무릎 언저리까지 눈에 파묻혔다. 제냐의 뒷모습이 안개 속에 사라질 때마다, 잠깐 고개를 돌렸는데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질 때마다 나는 완벽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무서워서 멈췄고, 무서워서 다시 걸었다. 유황 냄새가 미세하게 번질 때쯤 그리 멀지 않은 봉우리에서 수증기가 잔뜩 피어 올랐다. 그렇게 나는 간헐천 계곡을 지나, 무트놉스키 정상에 도착했다.

 

 

무트놉스키 화산

때로 어떤 여행지를 각인시키는 건 압도적인 풍광만이 아닐 수도 있다. 무트놉스키의 경우, 그것은 냄새였다. 날씨가 좋거나 한여름이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6월의 흐린 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와 수증기 속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로 이 땅을 먼저 훑었다. 안개가 걷히고 정상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눈에 띈 건 그다음 일. 그제야 풍경 감상을 시작하니 제냐가 배낭에서 간식을 꺼냈다. 연어 샌드위치와 초콜릿, 여기에 달고 뜨거운 차이 한잔. 생각해보니 여태 한 끼도 못 먹었는데 허기가 심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몸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보통 등반 전엔 식사를 하지 않는단다). 꼭 필요한 당만 빠르게 채운 뒤 곧장 분화구 안으로 내려갔다. 마치 땅이 숨을 쉬는 것처럼 여기저기 노랗게 변색된 구멍 사이로 유황 가스가 솟구치고 있었다. 웅덩이에 고인 진흙이 부글부글 끓었고, 한바탕 바람이 쓸고 지날 때마다 진한 유황 냄새가 뇌를 마비시켰다. 종종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버거웠다. 지구 앞의 인간이란 이런 존재구나, 나는 정신없이 코와 입을 틀어막으면서도 쉬지 않고 수증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냉엄하고 혹독하고, 그럼에도 저항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자꾸만 지구의 맨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무트놉스키에서의 마지막 목적지는 데인저러스 캐니언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까지 차를 타고 온 뒤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을 장소. 일대의 화산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너른 바위 언덕 귀퉁이에 거대한 폭포와 칼로 도려낸 듯 날카로운 협곡이 펼쳐졌다. 이름 그대로 정말 위험해 보이는 협곡을 앞에 두고, 우리는 한없이 저녁 식사에 가까운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이 거대한 눈밭이 초원으로 바뀌기 시작할 거예요. 무성한 풀과 수목 사이로 야생화도 흐드러지게 피어날 거고요.” 두툼한 눈과 얼음 아래, 꿈틀거리는 뜨거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캄차카라는 이름의 지구, 나는 이미 그 먹먹한 세계 안에 있었다.

 


<2019년 7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하나투어 www.hanatour.com 프라이드통상, 바이칼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