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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STIC - DOMESTIC TRAVEL
담양, 대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담양 숲길 예찬②

 

담양 죽녹원

죽녹원의 푸른 대숲.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다. 

 

죽녹원은 축제장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햇볕 아래 힘겹게 계단을 오르자 담양이 그토록 아끼는 31만 제곱미터의 대숲 공원이 돌연 눈앞에 펼쳐졌다. 사실 축제는 핑계고, 나는 이 대숲을 보러 온 거나 다름없다. “죽녹원의 대나무 군락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왔어요. 그 오래된 숲을 정비해 2005년 공원으로 만든 거죠. 8가지 주제의 산책로로 이뤄지는데, 대나무가 뿜어내는 음이온이 몸과 마음의 피로를 씻어주고 혈액을 맑게 해줘요.” 입구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천천히 숲길로 들어섰다. 초입의 이이남아트센터와 채상장(대나무로 채상을 만드는 장인) 서신정의 작품관, 죽공예품 판매점까지 거친 뒤에야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됐다. ‘죽마고우길’을 지나, ‘운수대통길’을 거쳐, ‘철학자의 길’을 굽이굽이 돌았다. “대나무는 하루 동안에도 1미터씩 자랄 수 있어요. 죽순이 솟아오른 그 해 초여름에 사실상 성장이 끝난다고 보면 돼요. 이후부터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땅속줄기로 양분을 보내 다음 세대를 기약하죠. 풀의 특성을 지닌 묘한 나무예요.” 실제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은 풀을 뜻하는 ‘초艸’를 거꾸로 뒤집어 만든 글자다.


숲길 안쪽을 파고들수록 나도 문화관광해설사도 말수가 줄었다. 얼만큼 걸었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 시야가 청명해져 느릿느릿 눈앞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대숲은 한 편의 시詩 같았다. 줄기를 쓸고 지나는 바람, 잎사귀 틈으로 꽂히는 햇살의 움직임마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서늘하고 청량한 초록빛 숨 안에서, 그야말로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담양

녹음이 우거진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을 빠져나오니 남은 일정이 허무해졌다. 남도의 초여름은 또 어찌나 억센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정수리부터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훑고 갔다. “메타세쿼이아길에 가보실래요? 1972년 국도변에 조성된 가로수길인데, 대숲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거든요.” 산림청과 생명의숲국민운동이 주관한 ‘2002 아름다운 거리 숲’ 대상, 2006년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최우수상. 오늘날 담양 메타세쿼이아길이 지닌 여러 타이틀 중 일부다. 이미 ‘꿈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세를 얻은 데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했던 담양의 대표 명소. 축제 기간인 만큼 인파가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동쪽으로 급히 내달렸다. 연화마을과 학동리 사이, 죽향대로변을 따라 2킬로미터 넘게 이어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이국적인 운치로 그득했다. 인파가 적진 않았지만, 다행히 산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쭉쭉 가지를 뻗은 아름드리 나무 아래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그림처럼 스쳐갔다. 슬슬 기울기 시작한 오후 햇살이 숲길의 밀도를 한껏 높였고, 군데군데 벤치며 정자마다 각자의 쉼을 즐기는 시민들이 풍경에 안온함을 더했다. 사방에서 빛이 부서졌다. 아주 연하고 순수한, 초여름의 빛깔이었다.

 

 

담양

한우떡갈비와 돼지떡갈비가 함께 나오는 정식.

 

담양 오일장

담양 오일장 초입.

 

죽녹원

죽녹원 산책은 수려한 선율로 마무리된다.

 

메타세쿼이아길 옆 메타프로방스에 들러 프랑스 남부 마을처럼 꾸민 관광단지 골목들을 돌아보다가 다시 죽녹원 근처로 돌아왔다. 관방천을 끼고 국수거리를 통과하자 곧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좁은 둑길 양쪽으로 색색의 파라솔이 빼곡했고, 각종 채소와 생선, 과일, 잡화를 파는 노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매달 2일과 7일마다 열리는 담양 오일장이었다. 만성교에서 담양교까지 600미터가량 이어진 장터 풍경은 직접 겪은 적도 없는 옛 시대의 정서를 자극했다. 대충 이어 붙인 천막이며 대나무 받침, 파라솔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검은 비닐봉지까지, 그린 듯한 재래시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시장길은 금세 끝났지만 천변가로 난 둑길은 관방제림까지 이어져 있었다. 200살은 족히 먹은 고목들이 1.6킬로미터가량 늘어선 관방제림은 죽녹원, 메타세쿼이아길과 더불어 담양이 자랑하는 10경 중 하나. 길 양편으로 170여 그루의 보호수를 가꾸고 있는데, 워낙 나무들의 수령이 많고 풍채가 시원시원해 오후 산책길로 딱 알맞았다. 무엇보다 둑길 아래 자전거길과 관방천, 그 너머 대숲이 어우러진 풍광이 무척이나 아늑했다. 몇 번이나 느린 걸음으로 관방제림을 오가다 완전히 해가 기운 뒤에야 현지 맛집으로 소문난 ‘금수한방숯불가든’을 찾았다.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대통밥이 포함된 떡갈비 정식.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우떡갈비와 돼지떡갈비, 대통밥이 죽순회를 비롯한 20여 가지 밑반찬과 함께 테이블을 꽉 채웠다. 숯불에 구워낸 떡갈비는 담백하면서 쫄깃했고, 초장에 갓 버무린 죽순회는 씹을 때마다 아삭거렸다. 과연 담양은 남도 미식가들의 성지였다.

 


<2019년 6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담양군청 www.damya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