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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북미
비컨힐에서 찰스강까지

보스턴을 걸었다①

 

보스턴 퍼블릭 가든

보스토니안은 나무와 꽃, 정원을 사랑한다. 모두를 위한 정원, 보스턴 퍼블릭 가든.

 

녹지를 걷든 시내를 훑든 혹은 미국독립전쟁사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따라가든, 걷는 이는 일단 보스턴코먼Boston Common에서 모인다. 1634년에 문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공원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못지않게 땅값 높은 도시에서 이 공원은 속없는 벌판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공원의 사방 꼭짓점이 모두 번화가로 뻗어 있어서 어디로든 향하기 좋다. 이 좋은 ‘목’이 보스턴과 미국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독립운동의 움직임, 노예제도 철폐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연설 등 이 나라에서 굵고 큰 변화를 만든 시민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보스턴이 ‘미국의 아테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개진할 수 있었던 열린 광장, ‘보스턴코먼’ 덕이다.


보스턴에 머무는 내내 호텔에서 느린 걸음으로 3분 거리에 위치한 보스턴코먼에 매일 들렀다. 아침이든 늦은 오후든 밤이든 공원은 늘 그때와 어울리는 활기를 띠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해 질 무렵. 목줄에서 해방된(허락된 구역이 있다) 반려견이 마음껏 뛰어놀고 아이들은 푸른 지붕 아래서 회전목마를 타고 젊은이는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인지 참고서인지 모를 것을 읽는 풍경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지던 순간. 하루의 황혼을 부드럽게 끌어안는 주홍빛 석양은 (종일 걷느라) 퉁퉁 부은 발과 허기에 아랑곳 없이 뭔가에 홀린 좀비처럼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 

 

 

보스턴 비컨힐

비컨힐에선 집의 얼굴, 각기 다른 화단과 문을 관찰하면 산책이 더 흥미롭다.

 

좀 더 걸을 수 있는 날엔 아침저녁으로 비컨힐Beacon Hill을 찾았다. 공원 맞은편, 인권 운동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미국에서 최초로 노예제도 폐지 연설을 한 파크 스트리트 처치Park Street Church를 오른쪽에 두고 걷다 보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만난다. 비컨힐은 매사추세츠주정부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이 도시의 명백한 상징이다. 17세기, 영국에서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들이 처음 마을을 세웠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스턴 최고의 부촌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딱딱한 상징적 의미와 역사적 사실이 비컨힐을 산책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건축가 이중원은 <건축으로 본 보스턴 이야기>에서 이곳이 왜 ‘걷고 싶은 거리’인지 설명한다.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담으로만 만들어진 거리는 결코 걷고 싶은 거리가 아니다. 끊임없이 내것과 우리 가족 것만을 중시하는 문화가 팽배해지고 만남과 대화의 장소인 거리는 소외된다. 열린 사회와 투명성이 높은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길이 내 집 앞에서 멈춰버린다. 담으로 둘러싸인 주택이 동네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컨힐은 날카롭게 비판하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걷는 사람이 ‘주인’인 길의 또 다른 매력은 한 치의 변덕도, 틈도, 흐트러짐도 없이 정직하게 지어진 적벽돌 건물의 완벽한 균형이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각기 다른 파사드는 루이스 칸의 명언 “건축의 파사드는 거리의 얼굴이다”를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교본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가 숙제처럼 비컨힐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컨힐 사람들은 화단과 문고리, 팻말 등으로 엄격한 균형 속에서 창의적인 균열을 낸다.

 

 

보스턴

보스토니안이 사랑하는 베이커리 ‘타테’.

 

비컨힐 아랫동네, 찰스 스트리트Charles St엔 발목을 잡는 가게가 많다. 보스턴에서 유명한 카페와 식당, 독립 패션 숍 등이 병정처럼 도열해 있다. 걸음의 리듬을 깨고 싶지 않다면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한다. 러닝복과 운동화를 파는 상점(그렇다. 보스턴엔 ‘나이키’나 ‘아디다스’ 매장이 아니라 러너에게 필요한 모든 스포츠용품을 모아 파는 복합 매장이 많다)을 겨우 참아낸 나는 찰스강으로 향하는 골목 진입로에서 보스토니안이 사랑하는 빵집, 타테Tatte의 공격을 받고 유혹에 굴복했다. 여기에서 매일 아침 신선한 빵과 커피를 먹었다는 뜻이다. 

 

 

보스턴 아콘 스트리트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콘 스트리트.

 

보스턴 찰스강

적벽돌 건축물, 찰스강, 달리는 사람들. 보스턴다운 풍경이다.

 

외곽 도로를 가로지르는 롱펠로 브리지Longfellow Bridge를 건너면 드디어 찰스강에 닿는다. 보스턴코먼에서 찰스강까지는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빠른 걸음으로 15분 안팎 거리다. 이곳엔 거짓말처럼, 걷거나 달리는 이만 있다. 강 위도 카약, 윈드서핑, 조정을 즐기는 이들로 분주하다. 한강을 곁에 두고 사는 서울 사람에게 ‘치맥’과 라면, 가끔 족발이나 짜장면이 주인공인 풍경과는 사뭇 달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운동복 차림이 아니었는데도 카메라를 들고 같이 달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싫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모든 풍경이 그림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봤을 뿐이다. 보스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걷고 뛸까? 당신이 만약 보스턴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나와 같은 대답을 들을 것이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옛날부터 그랬어.” 하루키 말마따나 ‘그냥 옛날부터 그랬던 것이 꽤 많은’ 것은 보스턴의 진짜 매력일 수도 있다.

 


<2019년 6월호>


글.사진 류진(프리랜서)
취재 협조 대한항공 kr.koreanair.com 미국관광청 www.gou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