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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STIC - DOMESTIC TRAVEL
담양, 5월 축제의 시작

담양 숲길 예찬①

 

담양

대나무 줄기가 사방에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마디마디 신록을 한껏 머금은 채 거대한 숲길을 발 디딜 틈 없이 꽉 메웠다. 빛 한 줄기, 바람 한 줌이 슬쩍 숲을 가로지르기라도 하면 가느다란 줄기들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거세게 휘청거렸다. 고상한 정취와 짙은 풀 내음. 바스락바스락, 비밀스러운 잎사귀들의 웅성거림. 종일이라도 그 속을 걷고 싶었다. 대숲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지금껏 대숲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초록빛 둥치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서늘하고도 우아한 세계. 비장한 적막과 날카로운 음영 사이로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무림의 고수들(무협지를 너무 많이 봤다). 그러니까 내게 대숲은 인간계로 위장되긴 했으나 사실상 판타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가본 적은 없어도 늘 익숙했고, 그래서인지 굳이 그 풍경을 직접 마주하려 애쓰지 않게 됐다. 매년 5월마다 담양에서 대나무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좋은 핑곗거리였다. 죽순이 솟아오른다는 초여름, 한창 농익은 대숲의 푸른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손끝으로 대나무를 두 동강 내던 무수한 고수들(을 연기한 배우들)도 스쳐갔다. 지금을 놓친다면 또 그렇게 아는 듯 모르는 듯 한참은 찾지 않을 동네, 나는 끝내 담양으로 향했다.

 

 

담양 대나무축제장

담양 대나무축제장에 들어선 작은 온실 식물원.

 

담양

관방천을 건너는 다리 위.

 

담양 담빛예술창고

담빛예술창고에서 막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시작된다.

 

담양은 대나무축제로 한창이었다. 몇 번이나 고속도로를 갈아타며 4시간 만에 도착한 남도 초입, 노란 햇살과 청청한 공기가 이 고장의 초여름을 알렸다. 축제장 한 귀퉁이에 차를 대고, 인파를 가로지르며 여정을 시작했다. 부러 평일에 찾아왔는데도 거리가 제법 북적거렸다. “이 정도면 사실 한갓진 편이죠. 내일부턴 정말 정신없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주말에 대체 휴일까지 더한 황금 연휴가 바로 코앞이었다. 담양군청 홍보팀 담당자와 함께 ‘한갓진’ 축제장부터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은 대나무축제의 여러 행사가 죽녹원과 관방제림 사이로 널찍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 둘째 날. “지금 메인 무대에선 전국 청소년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리는 중이에요. 오후엔 죽물시장 쪽에서 마당극이 있고요.” 옛 죽물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먹거리마당, 각종 죽공예품을 파는 판매마당을 지나 관방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햇살이 화사하고 수목이 풍성한 관방천 구름다리 주변으로 대나무 뗏목 3대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대나무 악기를 연주하거나 대나무 물총을 만드는 체험장에도 아이들이 꽤 많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태어나 처음 본 생죽순. 장정 팔뚝보다 몇 배쯤 두꺼운 죽순들이 검보랏빛 껍질에 감싸인 채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봄비 내린 뒤 나타난다는 우후죽순雨後竹筍, 예로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그 담양 죽순이구나. “죽순은 채취 기간이 무척 짧아요. 일단 땅 위로 올라오면 하룻밤 새에도 쑥쑥 자라거든요. 지금이 가장 부드럽고 신선한 죽순을 맛볼 수 있는 때예요.” 한참 죽순 얘기를 들으며 축제장 구석구석을 훑다 보니 금세 배가 고파왔다. 이미 오후 1시,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국수거리로 향했다. 대략 50년 전부터 관방천 옆 가로수길을 따라 하나둘 국숫집이 생겨나더니 금세 도시의 명물 거리로 자리 잡은 곳이란다. 떡갈비와 숯불돼지갈비의 고장에서 웬 국수인가 싶겠지만, 사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과거 담양의 죽물시장이 활발하던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에게 국수만 한 요깃거리도 없었을 테니까. 간단하고 푸짐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뜨끈하고, 뭣보다 값이 저렴하다. 지금도 이 거리에서 끓여낸 국수들은 좀처럼 4천원을 넘기는 법이 없다.

 

 

담양

갓 수확한 죽순들.

 

담양

국수거리 산책의 아름다운 마무리.

 

담양

한창 작업 중인 채상장 서신정 선생.

 

2대째 이어온 ‘할머니 시장국수’에서 멸치국물국수와 열무비빔국수를 주문한 뒤 도토리묵까지 곁들여 푸짐하게 끼니를 채웠다. 담양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담빛예술창고’에 들러 시원한 커피도 한잔 맛봤다. 1960년대의 양곡 창고를 개조해 지난 2015년 문을 연 이 갤러리 겸 카페는 담양군이 주도한 도시재생사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무엇보다 투박한 벽돌 건물 안에 숨은 현대미술 작품들, 감각적인 디자인 가구의 조화가 절묘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주말, 공휴일에는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진행돼요. 792개의 대나무 파이프로 특별 제작한 국내 유일의 오르간이죠.” 예술 작품으로 가득한 카페에 앉아 대나무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감상하는 시간은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선물 같았다. 진동하는 공기의 선율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했고, 대숲을 파고드는 바람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그야말로 묘한 여정이었다.

 


<2019년 6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담양군청 www.damya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