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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아시아
문명의 기원, 유프라테스강 탐험

아디야만, 고대 왕국의 관문②

 

유프라테스강

보트를 타고 유프라테스강을 달리다 보면 이런 절벽이 눈앞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다. 세월을 머금은 채 검게 변색된 석회암 사이에도 이미 봄빛이 가득하다.

 

다소 진부하더라도 여행자로서 언젠가는 정복하고 싶은 리스트가 있었다. 이를테면 세계 3대 폭포라든지, 3대 페스티벌이라든지, 4대 문명의 발상지 같은 곳들. 그런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문명(무려 기원전 40세기에 시작됐다)의 터전인 유프라테스강은 내 오랜 로망의 목적지였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발원해 시리아와 이라크를 관통하는 서아시아 최대의 강. 인근 티그리스강과 함께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이루며 일찍이 광범위한 문명을 꽃피운 고대 소아시아 역사의 원류다.

 

 

유프라테스강

과거 사람들이 거주했던 절벽 속 동굴. 위험천만한 절벽 타기 끝에 마주한 풍경은 이토록 평화롭다.

 

터키식 커피

아타튀르크댐 전망대에서 맛본 터키식 커피. 가루와 물을 함께 붓고 끓이기 때문에 무척 진하면서도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하는 길, 아침부터 하늘이 범상치 않더니 이내 비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하필 ‘강’을 보러 가는 날 비가 오다니, 불운의 아이콘이라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괴로웠다. 아디야만주 남쪽 끄트머리의 크즐인에 도착해 야생화가 만개한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웅장한 절벽 아래, 드디어 마주한 유프라테스강의 비경은 그간의 짧은 마음고생을 단번에 씻어 내렸다. 이 정도 빗줄기쯤이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강물은 더없이 푸르고 또 깊었다. 강을 경계로 주가 나뉘는데, 깎아지른 듯한 샨르우르파주의 기암괴석과 수목이 우거진 아디야만주의 푸른 언덕이 오묘한 에메랄드빛 강물 아래 눈부신 반영을 이뤘다. 빗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 보트 투어를 떠나기로 했다. 급히 절벽 아래로 내려와 정박해 있던 보트에 올랐다. 쾌활한 터키 청년 둘이 운전하는 보트는 탈탈탈 힘겨운 소리를 내며 강 한가운데를 내달렸다. 푸른 강물은 빗방울을 삼키며 유유히 흘렀고, 검게 변색된 석회암 절벽들이 세월을 잔뜩 머금은 채 치솟아 있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동물이나 사람이 숨어들 법한 작은 동굴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대에서 거주의 흔적이 종종 발견되기도 했단다. “그런 동굴 중 하나로 가볼 거예요. 약간의 등반이 필요하긴 하지만, 분명 마음에 들걸요?” 무스타파와 청년들을 따라 절벽 한 귀퉁이를 오르기 시작했을 땐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다만 몇 발짝 떼지 않아 직감했던 건, 앞으로 펼쳐질 액티비티가 ‘약간의 등반’ 수준은 아닐 거란 사실. 때로는 무스타파의 손에, 때로는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엄청난 겁쟁이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 틈새를 쉼 없이 올랐다. 1층, 2층, 3층, 위태로운 순간은 수시로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날쌘 현지인들이 이방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절벽 중턱, 거대한 동굴 구멍 너머 마주한 유프라테스강의 풍경은 과연 숨 막히도록 수려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 왜 고대인들이 이 위험천만한 절벽 안에 모여들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이런 풍경과 함께라도 그들의 삶은 고단했을 거다. 생존에 허덕이며, 매 순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갔을 거다. 동굴 안에는 그들이 우물로 쓰던 구덩이와 지친 몸을 뉘었을 휴식 공간, 바위를 깨어 새긴 삶의 터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프라테스강

터키 최대 규모인 아타튀르크 댐의 전경을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장소. 전망대 밖에는 댐을 만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유프라테스강이 품은 강인한 생명력은 비단 고대의 것만이 아니다. 연간 25억 톤의 물이 흐르는 이 길고 거대한 강줄기는 지금도 여러 국가들의 중요한 수자원이다. 불과 10여 년 전 강 상류에 조성한 아타튀르크댐Atatürk Barajı만 봐도 알 수 있다. 터키가 식수와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건설한 관개시설 및 수력발전시설인데, 이 프로젝트 때문에 시리아, 이라크와 국제적 긴장 관계에 놓이기도 했단다. 최대 저수량이 500억 톤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댐은 수천 년을 이어온 문명의 젖줄로서, 유프라테스강의 변함없는 존재감을 보여주는 가장 현대적인 장소다.

 


<2019년 5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터키항공 www.turkishairlin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