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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북미
현지인처럼 동네 산책,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내비게이션②

 

샌프란시스코

마리나 디스트릭트의 주택가. 도로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산책 중인 로컬 둘.

 

사실 대도시를 여행하는 이들에겐 꽤 많은 선택지가 있다. 2층짜리 관광버스를 타고 필수 명소를 훑거나, 시티패스 하나로 대중교통을 야무지게 활용하거나, 작심하고 한 동네에 주저앉아 종일 먹고 마시고 쇼핑하거나. 물론 초행길 코스는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개인적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면 늘 걷는 만큼 보인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니까 여정이 하루 이틀 쌓여 제법 풍경에 익숙해지고, 거리 이름에도 익숙해지고, 도시 전체가 대략적으로나마 머릿속에 그려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하루를 덜어내 산책에 나서곤 했다. 인파가 빨리 움직이는 곳에선 빠르게, 천천히 움직이는 곳에선 천천히, 그렇게 풍경과 속도를 맞추며 걷고 또 걷는 것.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로컬들에게 수집한 ‘걷기 좋은 동네’ 리스트를 취합해 여정이 끝나갈 무렵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산책 동선을 꾸렸다. 목표는 이러했다. 그래도 못 보면 서운할 테니 금문교부터 잠깐 감상하고, 필모어 스트리트를 따라 ‘퍼시픽하이츠’와 ‘필모어 디스트릭트’를 헤집은 뒤, ‘헤이스밸리Hayes Valley’ 너머 ‘미션 디스트릭트’에서 저녁을 맞이하는 것. 물론 선비다운 걸음걸이를 추구하는지라 완주에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기로 했다. 못다 한 산책은 다음 여행에서 다시!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계획인가.

 

 

샌프란시스코

제법 화창해진 날씨에 여행객들의 얼굴도 밝다.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스트리트를 걷다 마주친 멋쟁이 청년.

 

샌프란시스코

언덕길 위에서 내려다본 필모어 스트리트 끝자락.

 

그리하여 산책은 요트들이 빼곡히 들어선 마리나 디스트릭트 끝자락에서 시작됐다. 잘 정비된 해안가 산책로엔 사람보다 개가 더 많았고, 멀찌감치서 금문교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유일하게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었건만, 여지없이 해안가 주변엔 안개가 자욱했다. 푸르게 물결치는 바다와 붉은 다리, 야트막한 산등성이가 안개에 휩싸인 채 묘한 운치를 뿜어냈다. 한참 갈매기 떼 틈을 배회하며 바닷바람을 쐬다 마리나 대로 너머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공원으로 둘러싸인 고급 주택가가 차곡차곡 시야에 포개졌다. 한낮의 햇살과 고풍스러운 파스텔 톤 건물, 짙푸른 수목이 어우러진 거리는 더없이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다. 길이 필모어 스트리트에 접어들자 돌연 아찔한 언덕 경사면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길 양쪽으로 야트막한 주택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언덕과 건물 사이의 각도가 너무나도 드라마틱해 마치 장난감 모형 같은 모양새였다. 파도처럼 굴곡진 언덕 위로 햇볕은 점점 더 강렬해졌고, 다 올라왔다 싶으면 이내 새로운 언덕이 눈앞에 나타났다. 물론 오르막이 있으면 결국엔 내리막도 있는 법. 주택가의 끄트머리쯤 내리막으로 들어선 길은 한결 활기찬 번화가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거리의 인파가 많아지고 카페며 레스토랑, 고급 부티크와 골동품 가게가 빼곡한 걸 보니 여기가 퍼시픽하이츠 부근인 모양이었다. 언덕길 오르느라 고생한 팔다리를 잠시 쉬게 할 겸 ‘블루 보틀 커피’에 들러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창문 너머로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정표처럼 반짝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낯선 풍경, 낯선 공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꽤 빠르게 흐른다는 걸, 문득 휴대전화를 매만지다 깨달았다. 걷는 시간도 멈춰선 시간도 모두 다 산책이고 여행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미션 디스트릭트를 가로지르는 길.

 

길고 긴 필모어 스트리트를 빠져나와 미션 스트리트 초입에 닿았을 땐, 이미 날이 기울고 있었다. 잠시 지나친 헤이스밸리 주변으론 거리가 의외로 한산했는데, 갑작스러운 인파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도발적인 그래피티와 세련된 레스토랑, 빈티지 숍과 고급 부티크가 혼재한 거리엔 독특하고 이국적인 정서가 흘러넘쳤다. 과연, 샌프란시스코 힙스터들의 아지트라는 미션 디스트릭트다웠다. 오늘날 이 도시에서 가장 트렌디한 지역으로 통하는 미션 디스트릭트는 사실 남미에서 온 이민자들의 오랜 터전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늘 범죄로 들끓는 가난하고 지저분한 동네였지만, 젊은 아티스트들이 저렴한 집값을 찾아 하나둘 몰려들며 지역 전체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다. 낡고 후줄근한 건물 외벽이 감각적인 벽화로 치장되고, 싸구려 잡화점 사이사이 작지만 개성 강한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 실제로 미션 디스트릭트 곳곳을 헤집은 2시간가량의 산책은 필모어 스트리트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끔 위험하다 싶을 만큼 초점 없는 눈빛(대마초에 취한 듯한)이 불쑥불쑥 골목 끝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구석구석 보는 재미, 먹고 마시는 재미가 가득했다. 밤늦도록 흥청거리며 쏘다니고 싶은, 열띤 산책의 끝자락이었다.

 

 

<2019년 4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백지현
취재 협조 샌프란시스코 관광청 www.sftravel.com 유나이티드항공 www.unite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