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DOMESTIC - DOMESTIC TRAVEL
태백, 자연과 인간의 시간

겨울바람에 이끌려 태백으로 향했다. 스산하고 쓸쓸한 폐광 너머에 이 도시가 꿈꾸는 미래가 있었다.

 

태백 구문소

천연기념물 417호인 구문소의 전경.

 

최초석탄발견지탑

태백에서 처음 석탄이 발견된 장소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최초석탄발견지탑.

 

태백 물닭갈비

물닭갈비는 둘러앉아 함께 먹어야 제맛이다.

 

태백의 시작점과도 같은 옛 탄광 지역을 훑다 보니 슬슬 허기가 밀려왔다. 오후 1시. 다행히 점심 메뉴에 대한 고민은 1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태백 하면 물닭갈비, 여정을 앞두고 사실상 가장 기대한 만남도 물닭갈비였다. “닭고기에 고구마, 부추, 떡, 냉이 등의 부재료, 쫄면, 우동, 라면 등의 사리를 넣고 육수를 자박자박하게 부어 끓이는 향토 음식이에요. 과거 가난한 광부들이 음식량을 늘리기 위해 닭갈비에 물을 넣은 데서 유래했죠. 즉 광부의 애환이 담긴 요리예요.” 비록 가난에서 시작한 궁여지책이지만, 오늘날 태백의 명물로서 물닭갈비의 자부심은 꽤 견고한 편. 현지인들의 맛집으로 꼽히는 ‘서울 닭갈비’에서 물닭갈비를 주문하자, 육수가 찰방거리는 거대한 쇠판에 닭고기와 채소, 각종 사리가 푸짐하게 올라왔다. 닭볶음탕과도 유사했지만 전골에 더 가까웠는데, 냉이 향이 밴 육수가 담백하고 시원했다. 면과 채소를 먹고, 그사이에 익은 닭갈비를 먹은 뒤 남은 국물에 밥까지 비벼 먹으니 더 들어갈 구석 없이 배가 가득 찼다. 이토록 만족스러운 식사라니, 강원도의 세찬 겨울바람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철암탄광역사촌으로 가는 길, 구문소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강물이 산을 뚫어 만든 신비로운 지형. 구문소를 소개하는 단어들은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낙동강 상류의 황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점동의 큰 산을 뚫고 지나며 거대한 석문을 만들어 깊은 소를 이루고 있어요. 이걸 구문소라 부르는데, 낙락장송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일대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에요. 예로부터 시인이며 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건 그 때문이죠.” 시인도, 문객도 아니지만 과연 대자연의 조각품 앞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거대한 기암괴석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래 초록빛 강물이 깊고 고요히 잠겨 있었다. 물이 그저 흐르는 힘만으로 이 두꺼운 석문을 뚫는 사이, 도대체 이 땅엔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나타나고 사라졌을까.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더께 앞에서 여행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철암탄광역사촌

철암탄광역사촌 건물 뒤편. 탄광업이 한창일 땐 하천이 온통 검은빛이었다고 한다.

 

태백의 연탄들

연탄을 실어 나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철암탄광역사촌

철암탄광역사촌 곳곳에 재치 있는 조각상들이 숨어 있다.

 

태백

나무가 비처럼 쏟아지는 길.

 

물론 이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철암탄광역사촌이었다. 처음 문화관광해설사와 만나 지도에 머리를 맞대고 동선을 짤 때부터 “다른 일정을 빼더라도 꼭 가고 싶다” 간청했던 장소. 근래 태백의 존재를 젊은 여행객들에게 알린 데는 사실상 철암탄광역사촌의 공이 태백산 눈축제 못지않게 크다. “요즘은 SNS를 통해 사진이 퍼지며 점점 더 관람객이 늘고 있어요.” 간단히 소개하자면 ‘태백 석탄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한 생활사 박물관’이지만, 엄밀히 그것만으로 이 공간이 지닌 매력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철암탄광역사촌 탐방은 우선 철암동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60~70년 탄광업이 번성하던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광부의 수는 이 작은 마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특히 주거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그래서 본래 하천 변에 세워진 주거 건물의 공간을 바깥쪽으로 조금씩 늘린 뒤 그걸 목재나 철재 지지대로 하천 바닥에 연결했어요. 일명 ‘까치발 건물’이라 부르는 이 지역 특유의 주거 형태인데, 그중 정확히 11채를 본래 모습 그대로 복원해 지금 철암탄광역사촌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직접 마주한 까치발 건물의 전경은 그야말로 기기묘묘했다. 철암역 맞은편의 대로변에서 봤을 땐 평범한(조금 낡은) 상점 입구며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모양새였는데, 철암천 쪽으로 돌아가니 가느다란 철제 다리에 의지한 채 허공에 매달린 건물들의 뒷모습이 무척 위태롭고 스산했다. 한 시대의 번영과 쇠락을 그대로 봉인해둔 듯한 공간. 여기저기 금이 가고 페인트가 벗겨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건물들에 자꾸만 마음이 쓰여 먼발치에서 오래도록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11개 상점 중에선 여전히 영업 중인 곳도 있지만 간판과 내부 공간이 완벽히 일치하진 않아요. 문구점 안은 분식점이고 치킨집 안은 관광해설 사무실인 식이죠. 일부 공간은 역사촌 전시실로 쓰이고 있고요.” 전시실을 하나하나 돌며 탄광의 역사를 담은 여러 작품을 감상한 뒤 건물 옥상의 전망대에 올랐다. 철암역 너머, 아직도 일대 광산에서 실어온 원탄을 저장하고 이물질을 골라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선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서로의 뺨에 주먹을 맞대던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실제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금방이라도 비가(혹은 눈이) 쏟아질 듯 꾸물거리는 하늘이 쇠락한 탄광촌에 애잔함을 더했다.

 

 

<2019년 1월호>


에디터 류현경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tour.taebaek.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