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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ATIONS - 아시아
신선의 꿈, 구이린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3만 6000여 개의 봉우리를 바라본다.

신선이 된 듯, 나비가 노니는 듯 아득한 호접지몽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산수, 구이린을 만났다.

 

계림산수갑천하

 

신선의 꿈, 구이린

 

 

산수화의 현현

 

누구에게나 날카로운 첫 여행의 순간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라인 강변을 따라 달리는 열차에 올랐던 스물셋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생애 처음으로 맞닥뜨린 나라 밖 경관은 낯설어서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나 카스파르 프리드리히가 그려낸 장면이 모두 ‘실경’이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온 감각을 지배했다. 서구 문학이나 예술 속에서만 어름어름 접해온 ‘목가적인 전원’이 차창 너머 넘실거릴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가. 중국 광시좡족자치구의 북동쪽에 자리한 별세계, 구이린桂林을 여행하면서 이와 유사한 체험을 했다. 밤 비행기로 도착한 뒤 이튿날 아침이 밝았을 때, 커튼을 열어젖히자 눈앞에 펼쳐진 건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였다. 군락을 이루다시피 죽 늘어선 석회암 봉우리 사이로 옅은 운무가 꽃처럼 피어오르는 풍경. 꿈인지 생시인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한동안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 올렸을 때, 비로소 산봉우리의 능선이 좀 더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연 옛 그림과 이야기에서 보아온 선계의 풍경 그대로였다.

 

양숴에서 만난 먀오족 소녀

양숴에서 만난 먀오족 소녀.

 

전통 방식으로 만든 대나무 뗏목을 타고 노니는 사람들

스리화랑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대나무 뗏목을 타고 노니는 사람들.

 

룽지티톈

소수민족이 모여 다랭이논을 일구고 사는 룽성의 산골 마을, 룽지티톈.

 

구이린은 광대한 중국 대륙 안에서도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구이린의 산수가 천하제일이라는 뜻)’라는 찬탄 어린 수식어로 불리곤 한다. 도깨비 뿔처럼 솟아오른 3만 6000여 개의 석회암 봉우리가 이루는 독특한 카르스트 지형은 이 고장의 명성을 한껏 드높였다. 송대 산수의 대가 미불은 바로 이곳의 비경을 즐겨 그렸다. 북송의 이름난 화가를 묶어 일컫는 ‘북송 4대가’의 한 명이었던 미불은 쌀알만 한 점으로 산수를 그려가는 기법인 미점준의 창시자이자, 중국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화폭에 구이린의 실경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다. 구이린을 비롯한 광서 지역에서 관리로 일하며 수많은 시서화를 남긴 그는 오늘날 중국을 넘어 전 세계 미술 애호가의 발길을 한 점으로 그러모으고 있다. 동양적 유토피아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열망은 서구의 여행자 사이에서도 빠르게 촉발됐다.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나 <페인티드 베일>이 담아낸 구이린의 기기묘묘한 산수는 그들의 호기심 혹은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눈부셨다. 우리가 경쟁하듯 멀리, 더 멀리 떠나는 것에 골몰할 때, 벽안의 모험가들은 오직 무릉도원을 두 발로 거닐기 위해 동양의 외딴 산골짜기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여정은 구이린 시내에 그치지 않았다. 인민폐 20위안 뒷면에 그려진 비경을 품은 양숴현阳朔县(이하 ‘양숴’)과 소수민족이 저마다의 삶의 양식을 이어온 룽성각족자치현龙胜各族自治县(이하 ‘룽성’)을 누비며 이곳의 유구한 문화를 향유하고 싶어 했다. 광시좡족자치구 내에서 경제 규모로 네 번째 가는 작은 도시면서도, 곳곳에 수많은 고급 리조트와 호텔을 유치하고 ‘시제西街(서양인 거리)’를 형성한 구이린의 관광산업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엔 구이린 내에서도 가장 많은 여행자가 찾아드는 양숴에 부티크 디자인 리조트 ‘알릴라 양숴Alila Yangshuo’가 들어서 여행업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양숴시제에서 전통 복식을 차려입고 산책하는 여인들

양숴시제에서 전통 복식을 차려입고 산책하는 여인들. 걸음이 흥겹다.

 

먹색의 기와지붕이 구이린의 풍광처럼 첩첩산중의 형국으로 펼쳐진다

먹색의 기와지붕이 구이린의 풍광처럼 첩첩산중의 형국으로 펼쳐진다.

 

민속촌 스와이타오위안의 서예가가 있다

양숴에 위치한 민속촌 스와이타오위안의 한편엔 족자에 글을 써주는 서예가가 있다.

 

이곳에선 누구에게나 신선의 눈이 주어진다. “강은 푸른 비단을 두른 듯하고. 산은 벽옥으로 만든 비녀 같구나.” 당나라의 시인 한유의 절창도 천하제일 산수 구이린의 아름다움엔 못다 닿는다.

 

뎨차이산 꼭대기

1 뎨차이산 꼭대기에 오르면 구이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즈파이를 하는 노인들
즈파이

구이린에선 마작보다 즈파이纸牌를 하는 게 더 보편적이다. 기다란 패를 쥐고 하는 숫자 놀음인데, 시내 곳곳에서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놀이를 하는 모습을 자주 마주친다.

 

전통 복식을 입은 먀오족 여인들

전통 복식을 입은 먀오족 여인들.

 

룽후공원의 작은 대숲에서 발견한 낙서들

룽후공원의 작은 대숲에서 발견한 낙서들.

 

구이린을 다음 행선지로 낙점한 건 그 즈음부터다. 마침 이 글이 당신에게 닿게 될 10월은 구이린의 울창한 계수나무 숲이 노란 꽃망울을 틔우는 시기다. 아마도 이 계절의 구이린은 무릉도원이라는 이상향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념을 실체로 확인하는 일이란 이토록 마술적이다.

 

 

 

<2018년 10월호>

 

에디터 강은주

포토그래퍼 전재호

취재 협조 하나투어 www.hanatour.com